나창호 전 부여군 부군수
[시선]

우리나라 동해에서 나는 겨울철 생선에 도루묵이 있다. 비린내가 나지 않아 맛이 담백하고 시원한 생선이다. 구워서도 먹고 조림을 해서도 먹는데 열량이 아주 낮아 다이어트에도 효과적이라 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아주 열심히 하다가 순간적인 실수로 헛일이 됐을 때 "말짱 도루묵 됐다"는 말을 하는데 이 생선 이름과 관련이 있다. 이 생선의 이름은 원래 '묵'이었는데 '은어'로 승격했다가 '도로묵'이 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무능한 군주 중 하나인 선조가 임진왜란 때, 한양 도성을 버리고 허겁지겁 피난길에 올랐다. 평양을 거쳐 의주에까지 이르는 피난길이 편할 리 없었다. 고난의 길에 먹거리도 시원찮고 때로는 끼니를 못해 배고픔이 심했다.

그런데 무척 배가 고프던 어느 날 밥상-원래 임금님 수랏상이라고 하는데, 당파로 국론을 분열하고, 외침을 당해 온 국토를 적의 말발굽에 짓밟히며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멍청한 군주에게 수랏상은 과하다-에 올라온 생선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먹고 나서 생선 이름을 물으니 '묵'이라고 했다.

선조는 '묵'은 맛있는 생선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니 "앞으로 은어(銀魚)라 부르라"고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궁으로 돌아온 선조가 어느 날, 맛있던 은어가 생각나서 다시 먹어 보니 전혀 옛날 그 맛이 아니었다.

궁에서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웠으니 배고플 때 먹던 옛날 그 맛이 나겠는가. 맛이 너무나 형편없었던지 역정을 내며 "도로 묵으로 부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어는 다시 당초의 이름 '묵'이 아닌 새 이름 '도로묵'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가을철이면 일본 도쿄의 메구로(目黑)역 부근에서 숯불로 구운 꽁치 수천마리를 공짜로 나눠주는 꽁치축제가 열리는데,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 이에도 꽁치와 관련된 사연이 있다.

에도막부 시대 제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어느 날 신하들과 매사냥을 나갔는데, 신하가 깜빡하고 점심을 준비해 오지 않아 쫄쫄 굶게 되었다. 무척 배가 고픈데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메구로의 꽁치가게에서 꽁치 굽는 냄새였다. 쇼군이 "이게 무슨 냄새냐?"고 묻자, 신하가 서민들이나 먹는 생선 굽는 냄새인데 토노사마(다이묘의 높임말)께서 드실만한 음식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에 쇼군은 "지금 그런 걸 따질 형편이 아니다. 빨리 가서 가져오라"고 했다.

몹시 시장하던 참에 먹은 꽁치라서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막부에서 어느 날 쇼군이 맛있는 메구로 꽁치가 생각나 꽁치구이를 대령하라고 했다. 신하는 토노사마의 건강을 염려해 뼈를 바르고 기름을 빼며 구운 꽁치를 올렸다.

쇼군이 먹어보니 지난날 꽁치 맛이 아니었다. 쇼군이 어디서 가져온 꽁치냐고 물으니, 신하가 니혼바시 어시장에서 바로 가져온 싱싱한 꽁치라고 대답했다.

이에 쇼군이 "꽁치는 역시 메구로의 꽁치가 제일"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제3대 쇼군으로 즉위했을 당시에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는 것을 풍자한 설이라는 얘기도 있다. 메구로의 꽁치축제는 이에서 비롯됐으며, 1996년에 처음 시작됐다고 한다.

우리는 도루묵과 메구로의 꽁치사례에서 먹는 것에 신분의 귀천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일국의 왕이라도 배가 고프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최고 지배자가 통치를 잘 해야 백성이 편안함을 알 수가 있다. 현대 국가에 있어서도 최고 통치자의 선택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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