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규의 서예이야기]

한민족(韓民族)은 예부터 북방의 여러 민족과 다투고 있었다. 송(宋)나라 때에는 이 북방에서 큰 물결이 중국전토를 삼켜버릴 기세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글안인 요(遼)에 대해 송화강 근처에서 일어난 여진(女眞)의 나라, 금(金)이 점차 강대해져 갔다. 드디어 1127년 금의 대군은 남하해 송나라의 도읍인 변경(京-開封)을 함락 시켰다.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도 황후나 대관(大官)들도 포로가 돼 북방으로 연행됐다. 남아 있는 송의 세력은 휘종의 동생을 세워 고종(高宗)이라 하고 남쪽에 옮기기로 했다.

이 때 변경(京)에 남아 금군(金軍)과의 제1선을 지킨 것이 종택(宗澤)이었다. 종택의 밑에 악비(岳飛)라는 젊은 장교가 있었다. 농민출신이었으나 그 힘은 능히 3백근의 활을 쏘고 과감한 행동으로 수많은 공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종택은 이 청년의 힘을 더욱더 뻗게 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악비를 불러 말했다. “자네의 용기와 재능은 옛적 명장들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야, 하나 한 가지 주의를 주겠다. 자네는 즐겨 야전(野戰)을 하는데, 그래서는 만전의 계략이라고 할 수 없네. 이걸 보게” 하면서 악비에게 보인 것은 군진(軍陣)을 펴는 방식을 설명하는 진도(陳圖)였다. 이 때였다. 젊은 악비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서슴없이 큰 소리를 쳤다. “진(陣)을 치고 그 다음에 싸운다는 것은 전술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운용의 묘는 자기 일심(운용지묘 재일심:運用之妙在一心:운용의 오묘함은 한 마음속에 있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술은 방식이다. 그 형(型)만을 가지고는 쓸모가 없다. 이것을 활용하느냐 못하느냐는 그 사람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는 것이다. 활용하지 않으면 형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렇게 말하는 악비에게서 종택은 보통 아닌 어떤 영특함을 보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좋아….”

종택은 그 후 황제 측근의 움직임을 통분하면서 죽었다. 하나 그의 눈은 틀림이 없었다. 악비는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남송(南宋)의 명장이 됐고 금(金)의 기세를 누르며 싸웠다. 이것이 금(金)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진회(秦檜)에게 모살(謀殺)돼 그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신(神)으로 모셔진 저 유명한 악비 그 삶이듯 올바른 마음을 갖으려면 남모르게 갈고 닦은 실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들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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