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신 충남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

요즘 인터넷에서 ‘대충살자’ 시리즈가 인기다. 이런저런 사진들을 ‘대충살기’로 표현한 유머지만 우리 젊은이들의 마음 같아 안쓰럽다. 살아가는 방식도 시대에 따른 유행이 있나보다. 우리들 시대는 ‘절대 대충 살면 안된다’고 배웠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타의 모범이 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나름 효과가 있어서, 흙수저들이 열정과 노력으로 이룬 성공신화는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열정을 끌어내려 애썼고, 최선을 다해 살았으며, 자식들과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적어도 우리에게 열정은 게을러서 다 못쓰고 가는 무궁무진한 자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들에게 열정은 한정된 자원이다. 최고치를 경신하는 실업률, 분노지수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집값, 계속 달아나기만 하는 여유라는 놈들 때문에 잘못 열정을 끌어내다가는 번아웃(burn out)되거나 자포자(自暴者)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젊은이들 역시 잘 살고 싶어할 것이라 믿는다. 그들이 만들어낸 ‘대충살자’는 말은 ‘남 눈치보며 살지 말고, 나 자신으로 뜨겁게 살고 싶다’는 다른 표현일 것이다.

한창 교복과 두발 자유화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어른들은 ‘학생답지 못하다’며 격렬히 반대한다. 아이들은 왜 자신들의 옷과 머리와 행동을 어른들의 눈에 맞추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광장에는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학교에는 없는 이유를 답해 달라’고도 한다.

아무도 ‘~답지’ 않은 시대에 왜 유독 학생만 ‘~다워야’하는지, 학생다움의 실체는 무엇인지 나 역시 몹시 궁금하다. 설사 실체가 있다한들 까짓것 학생답지 않으면 어떤가? ‘양말은 색깔만 같으면 상관없는 김동완처럼, 베토벤의 높은 음자리표처럼, 걷기 귀찮아서 미끄러지는 북극곰처럼, 파마 망쳐 삭발한 철연이처럼’ 그렇게 대충 산다한들 총 맞아 죽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나는 이럴 때마다 ‘뭣이 중한디!’라는 말을 생각한다. 어른들이 그렇게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학생다움’ 때문에 아이들이 정말 중요한 것들을 대충하며 살면 어쩐단 말인가? 모든 것을 열심히 하려다, 정작 타인에 대한 배려, 환경에 대한 관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유지, 정의에 대한 용기, 시민으로서의 책임감, 민주주의조차 대충 하자고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들의 열정이 무궁무진하지 않음으로 해서, 조금 덜 중요한 것은 대충 살도록 눈 좀 감아주자. 돌아보면 부질없는 것들을 목숨처럼 붙들고 아등바등 산 날들을 후회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까짓것 대충 사는 젊은이들에게 눈 질끈 감자. 그들이 정말 중요한 것에 열정을 쏟도록 대충대충 봐주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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