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15 日本의 扶餘 '神宮' 건설
내선일체 정책 추진 미나미 총독, 신궁터로 부여 삼충사 자리 찍어
일본 동경 1급신궁과 같은 ‘격’…, 1939년 7월 日 천황 직접 발표
부지·공사비 규모… 상상 뛰어넘어, 현 부여읍 뻥 뚫린 도로도 그 흔적
일제, 한반도 최고 관광도시 계획…, 전쟁 길어졌다면 역사 바뀌었을 듯

 

▲ 일제시대 내선일체 정책을 미친 듯 추진하던 미나미 지로 총독이 신궁 터로 점 찍은 곳이 지금 부여의 삼충사 자리다. 사진은 현재 전경과 내부 모습. 부여군 제공

창씨개명, 한글 말살 등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정책을 미친 듯이 추진하던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은 육군대장의 예복을 입고 1937년 4월 충남 부여를 방문했다. 그는 부여 백마강, 부소산, 낙화암 등을 하루 종일 돌아보고 지금 삼충사 자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삼충사는 계백, 성충, 흥수 등 백제말기의 세 충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미나미 총독은 부소산 자락의 삼충사에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 자리야말로 일본이 제국의 차원에서 은밀히 추진하던 '신궁(神宮)'터로 점을 찍은 것이다.

신궁은 일본 왕실의 조상신인 아미테라스 오미카미를 제사지내는 등 천황을 신격화하고 종교차원으로 일본인의 정신을 하나로 만드는 구심체 역할을 해왔다. 총독부는 서울 남산에도 신궁을 세웠지만 부여에 세우려는 신궁은 그 보다 격이 훨씬 높은 것으로 일본 동경에 있는 1급 신궁과 같은 격을 부여할 계획 이였다.

이것은 천황이 제례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부여를 천황이 머무는 '제2의 황궁'으로 만들고 나아가 조선과 일본을 '같은 조상, 같은 뿌리(同祖同根)'라는 그들 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나아가 조선인의 얼을 완전히 빼앗고, 만주와 중국에 까지 일본의 혼을 확산시키는 중심 역할을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미나미 총독이 부여를 다녀간 뒤 부여의 신궁 조영사업은 일본 본국의 궁내선 주도로 급속히 전개되어 1939년 7월 31일, 히로히또 일본 천황은 직접 라디오 방송을 통해 충남 부여에 신궁을 세운다는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천황이 이렇듯 직접 발표를 할 정도로 부여 신궁건설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 언론들이 일황의 발표를 계기로 다투어 '부여 신궁' 특집 보도를 한 것만 보아도 이 사업을 일본이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 일제시대 내선일체 정책을 미친 듯 추진하던 미나미 지로 총독이 신궁 터로 점 찍은 곳이 지금 부여의 삼충사 자리다. 사진은 현재 전경과 내부 모습. 부여군 제공

 

신궁부지는 6만5000평, 지금 대전공설운동장이 체육관을 포함해도 4만5000평인 것에 비해 2만평이나 큰 규모였고, 공사비 역시 충남도청 신축비가 16만7400원이였는데 비해 부여 신궁은 24만원이나 되었으니 얼마나 큰 스케일이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당시 부소산 지역은 민가 150호에 인구는 920명에 불과한 촌락이었는데 일본은 이곳에 신궁을 건축하면서 인구 7만5000명의 서울 다음으로 큰 도시를 조성 할 계획으로 시가지 계획도 마련했다. 지금도 부여읍이 읍 단위임에도 도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있음은 그때의 자취를 엿보게 한다.

가장 주목 할 점은 부여~논산 간 고속도로를 계획했다는 것. 독일을 제외하고 '고속도로'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던 때인데 일본과 전국에서 몰려들 참배객 수송을 위해 이처럼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이와 같은 모든 증언은 고인이 되신 故 홍사준 부여박물관장이 필자에게 증언해 준 것임). 이밖에도 서해를 통해 들어 올 참배객을 위해 강경~부여강변도로를 건설하고 민간자본을 유치, 호텔 등 숙박시설을 갖춰 한반도 최고의 관광도시로 만들 계획이었다. 실제로 당시 서울의 최고 백화점 '和信'의 소유주였던 박흥식은 이곳에 관광호텔을 지으려고 땅을 사들이기도 했고, 마쓰우로라는 부동산 회사는 마구잡이로 땅 매입에 나섰는데 지금도 부여읍 토지대장에는 그의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공사 인력은 '제국의 성업'이라는 미명하에 조선은 물론 일본에 있는 초·중·고·대학생, 공무원들을 동원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이 점차 패퇴하기 시작하자 부여 신궁 공사는 1944년 중반이 되면서 흐지부지 되기 시작했는데, 만약 전쟁이 2~3년만 지연되었다면 부여는 최고의 관광도시가 될 뻔했다. 부여가 안고 있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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