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24 仁祖의 공주 피난살이
1623년 광해군 축출 후 인조 즉위
중심인물 이괄 반란… 파죽지세 전진
인조 공산성 피신中 이괄 암살돼
쌍수정 앞 나무에 ‘대부작’ 하사…
영조 정자 짓고 숙종 사적비 세워
인조 6일 체류… ‘인절미’ 이때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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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전경. 문화재청 제공
▲ 조선 숙종 때 세운 쌍수정 사적비. 문화재청 제공
1623년의 '인조반정'(仁祖反正)은 서인파에 의한 군사 쿠테타였다. 김류, 이귀, 이괄 등이 무력으로 광해군을 왕좌에서 축출하고 선조 후궁 소생인 원종(元宗)의 아들 능양군을 왕위에 앉혔기 때문이다. 능양군이 곧 인조이다.

그런데 5·16 군사 쿠데타도 그랬듯이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그 공훈을 둘러 싸고 내분이 벌어졌다. 중심 인물은 이괄. 사실상 인조임금을 세우는데 행동대장 역할을 한 이괄에게 돌아온 공훈은 '정사공신 2등급'이었다. 1등급에서 밀려난 이괄의 불만이 폭발 직전인데 조정에서는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이유로 그를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발령을 냈다.

그가 불만을 꾹 참고 관서지방 방어에 전념하고 있는데 1624년 2월 한 통의 밀고가 인조임금에게 전달됐다. 이괄과 그 아들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 그해 3월 6일 조정에서는 이괄의 주둔지에 금부도사를 보내 우선 이괄의 아들을 압송해 오도록 했다. 그러자 그동안 입술을 깨물며 숨을 죽이고 있던 이괄은 드디어 조정에서 내려온 금부도사 등 일행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이 함경북도에서 거병을 하자 뒤에 따르는 군사가 1만 2000명이나 되었고 이중에는 임진왜란 때 참전했다 조선군에 투항한 왜병 130명도 끼어 있었다.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밀고 내려왔다. 평양, 개성 등이 잇따라 무너지자 3월 26일 인조는 서둘러 피난길에 나섰는데 한강에서 강을 건널 때는 배를 못 구해 한동안 갈팡질팡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마음을 사지 못했던 것이다.

인조가 도착한 곳은 공주 공산성. 이괄은 반란을 일으킨 지 한 달도 안 돼 3월 29일 서울을 점령하고 자기 멋대로 흥안군을 왕으로 앉혔다. 그러니까 잠시나마 한 나라에 왕이 둘이 된 셈이다. 인조는 공산성에서 쌍둥이처럼 서 있는 두 그루 나무에 기대어 매일 같이 금강 건너에서 오는 파발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물론 이괄의 반란이 평정됐다는 소식을 기다린 것.

그러던 4월 1일 관군의 공격이 좁혀 오는 가운데 뜻밖에도 이괄이 아끼던 자기 부하의 손에 암살됐다는 소식이 인조임금에게 전달됐다. 이 소식을 쌍수정 앞 나무에서 보고 받은 인조임금이 너무 기뻐하여 기대고 있던 두 그루의 나무에 '대부작'이라는 지위를 하사하고 머물고 있던 곳을 쌍수산성이라고 명했다. '대부작'이란 속리산 정2품 소나무처럼 벼슬은 아니지만 남작, 백작과 같은 명예의 품격이니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며 나무는 늙어 죽었는데 1734년 영조 10년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이 애틋한 나무의 사연을 기리고자 이곳에 '쌍수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숙종 때에는 사적비를 세웠다. 그리고 지금은 이 정자가 공산성과 함께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보호받고 있다.

인조가 6일 동안 이곳에 머물 때 또 하나 전설을 만들어 냈다. 우리들이 즐겨 먹는 떡 '인절미'의 탄생이다.

인조가 피난생활에 입맛을 잃고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공주에 사는 '임씨'라는 사람이 콩고물을 묻힌 떡을 만들어 바쳤다. 인조는 그 떡이 너무 맛이 있어 "이 음식의 이름이 무엇인고?" 하고 물었다. 신하가 "그건 이곳에 임씨라는 사람이 만든 떡인데 이름은 모르겠습니다"고 대답했다. 임금은 '임씨가 만든 절세의 맛'이란 뜻으로 '임절미'라 불렀고 그것의 발음이 '인절미'로 변형됐다는 것이다.

공주시는 '공주 인절미'를 특허청에 상표등록 했다. 그래서 공주는 떡집이 많고 백제문화제 때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 인절미 만들기를 하는데 그 길이가 기네스북에 까지 올랐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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