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환 나음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남자들은 억울하다. 농담으로 한 말인데 웃자고 한 이야기고 반응도 좋았던 것 같은데 난데없이 성희롱이라며 공격한다. 성희롱은 저 멀리에 있는 나쁜 인간들이 처음부터 하려고 마음먹고 한 행동이지 자신이 직장이나 학교에서 동료나 부하, 후배에게 가볍게 던진 말이나 눈길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미투 운동으로 쌓여있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나오자 자신들이 가볍게 한 말이 여성에게 가볍게 들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억울하다. 그래서 미투 운동으로 불거져 나온 여성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불편하다. 그렇다고 지금 거대하게 쌓여있던 분노를 표출하는 여성 앞에서 억울하다는 항변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남자들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혜택이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한 부당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누리던 당연한 권리를 불편하게 하는 행위도 자유를 빼앗는 폭력이라고 여긴다. 억압되어 있던 흑인들이 평등을 외치며 투쟁할 때 백인들은 왜 저렇게 당연한 것에 화를 내냐며 오히려 흑인을 비난하고 공격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고 피해자들의 입장을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인종차별을 당연하게 여겼던 백인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고 있었던 많은 남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여성 차별, 혐오에 대해서는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인식하지도 못했던 것을 봐야 하고 이제는 조심해야 한다. 이건 화가 나는 일이다. 그럼 어떻게 행동할까?

동의하지 않지만 힘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될 때 보이는 인간은 과잉보상을 하게 된다. 분노가 치밀지만 직접적으로 화를 표현했다간 크게 다치겠다고 느낄 때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처럼 하지만 실은 상대를 공격하는 행동이다. 학교에서 머리를 단정하게 하라고 주의를 받은 학생을 생각해 보자. 학생은 화가 났지만 머리를 깍지 않으면 처벌 받을 것이 명확하다. 처벌을 받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내가 명령에 따르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 이때 학생이 선택하는 건 과다하게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 즉 삭발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머리를 단정하게 하라고 했지 삭발을 하라고 한 건 아니다. 하지만 학생은 과다하게 행동함으로서 선생님의 주의가 삭발을 요구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겉으로는 단정하게 하라는 요구에 순종한 것 같지만 실상 선생님에게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과잉 보상은 상대를 매우 엄격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성은 미투 운동을 통해 자신들을 존중해 달라는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맨살을 쳐다보지도 말고 말을 걸지도 말며 회식에서 마주치지 말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을 성적 대상이 아닌 동료로 인간으로 예의를 가지고 대해달라는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도한 펜스룰을 적용하는 행동은 여성들이 부적절하고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항의하는 의미로 보여 진다. 과도한 펜스룰을 적용하고 자신들이 누리던 자유를 빼앗기는 것에 반항하기 앞서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내가 만일 우리 집안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면, 우리 딸이 나와 같은 동료, 선배를 만났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면 과도한 펜스룰을 적용하는 공격적인 행동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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