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
단독·무기항·무원조 … 209일간 요트로 지구한바퀴 돌았다
충북청주출신… 집팔아 요트사고 해양모험 시작
7m 파도에 배 2번이나 뒤집혀
상처받은 국민위해 희망항해
“편안하고 안락한 삶도 살아봤지만 행복하지 않아 불가능에 도전했다”

▲ 국내 최초로 단독·무기항·무원조 요트 세계일주에 성공한 김승진 선장은 ‘도전하는 용기가 중요하다’며 끊임없이 도전한다면 반드시 이뤄지는 것이 꿈과 희망이라고 말했다. 김승진 선장 제공
"어릴 때는 약하고 못나고 진득하게 한 가지 일을 못하는 성격이었다. 주산학원, 태권도학원을 보내면 담벼락에 한참 서 있다가 시간 되면 집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배울 땐 재미있는데 같은 걸 계속 반복하니까 지루했다. 내 스스로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한마디로 자기 고집이 강한 우울한 아이였다. 하지만 의지와 호기심만큼은 강했다."

국내 최초로 단독·무기항·무원조 요트 세계일주에 성공한 해양모험가 김승진(53) 선장 얘기다. 그가 당진 왜목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의 집념이 두려웠다. 그 불굴의 정신이 두려웠다. 오로지 바람의 힘만 믿고 어찌 홀로 망망대해를 표박(漂泊)하고 다녔을까.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안겨준 '바다의 영웅' 김 선장을 떠남과 귀휴의 장소였던 당진 왜목항에서 만났다. 나는 단연코 그를 '요트 위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 '21세기 이순신'이라고 칭하고 싶다.


-왜, 왜목항에서 출발했나.


"마리나는 여러 도시에 있지만 왜목 사람들은 정이 깊다. 어느 식당은 건강만큼은 책임지겠다며 음식을 무료로 제공해줬고, 부녀회는 항해 때 먹을 음식을 바리바리 싸줬다. 동네 분들 인정, 그런 게 좋더라. 항해 중에도 계속 생각났다. 대도시에서 일주를 시작했다면 차갑지 않았을까. 후원의 양은 많았을지 몰라도 동네사람들과의 소통, 커뮤니케이션은 없었을 것이다."

-왜목항이 떴다.

“충청도 뚝심으로 똘똘 뭉쳐서 세계 일주 행사를 치러내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해맞이 명소로만 알려졌던 왜목항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수심도 얕고 삼면이 가로 막혀 마리나의 최적지이자 해양교육의 적소다.”

-기념관도 계획하고 들썩들썩해야 하지 않을까. 위대한 기록을 세웠다며 초반에 반짝하고는 시간이 좀 지나면 잊힐까 걱정이다.

"베이스캠프는 떠날 때도, 다시 돌아왔을 때도 베이스캠프다. 충남도와 당진시, 해양수산부가 관심을 갖고 나의 프로젝트를 지원해주고 있다. 마리나 계획도 적극적으로 밀어준다. 자치단체, 지역주민들, 부녀회, 상가번영회도 도와준다. 예전에 해수부장관이 그러더라. 우리나라는 어촌계 때문에 망한다고. 관청이 밀어주고 어촌계에서도 밀어주는 건 모범사례다."

그는 장장 209일간 적도와 피지, 칠레 케이프혼, 남아공 희망봉, 인도네시아 순다해협을 거쳐 총 4만1900㎞(2만2600해리)를 항해했다. 지구 한 바퀴 거리이고, 하루에 200여㎞를 밤낮없이 달린 셈이다. 그 둘레는 두려움의 반경일 수도, 외로움의 총량일 수도 있다.

-담대한 도전, 위대한 일을 해냈다. 어떻게 세계일주를 계획하게 됐나.

"보통사람들이 얘기하는 편안한 삶도, 안락한 삶도 다 해봤는데 그것이 행복하지 않다는 묘한 딜레마에 빠졌다. 자식들이, 돈 걱정하면서 그냥 비실거리고 인생을 산 아버지를 좋아할까, 돈이 없어도 자기 꿈을 향해서 모든 것을 건 아버지를 좋아할까를 생각하면 난 후자라고 생각한다."

-요트 세계 일주의 성공요건은.

"세계세일링속도위원회(WSSRC)에서 요트 세계일주 성공을 공식 인정받으려면 단독, 무기항, 무원조여야 한다. 반드시 적도도 2회 이상 통과해야 한다. 모든 경로를 한쪽 방향으로 지나야 하고, 2만1600해리(4만㎞) 이상을 항해해야 한다. 항구에 정박하지도 않고(무기항), 다른 배 도움 없이(무원조), 홀로 요트 한 척만으로(단독) 지구를 한 바퀴를 돌았다."

1969년 영국의 로빈 녹스 존스턴이 312일 만에 처음 성공한 이후 지금까지 호리에 겐이치(일본·1974년), 제시카 왓슨(호주·2010년), 궈촨(중국·2013년), 아브힐라시 토미(인도·2013년) 5명만 성공한 대기록이다. 김 선장이 항해를 성공했을 때 존스턴은 곧바로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

-원래 담력이 센가.

“어렸을 때 몸이 약해 신장염을 심하게 앓았다. 아버지가 개구리 뒷다리를 볶아주어 맛있게 먹던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스케이트를 사줬는데 3시간 만에 배웠다. 그때 이후 자신감이 붙은 것 같다.”


-해병대를 나왔나.


"(웃음) 방위 출신이다."

-200일이 넘는 항해였다. 외롭지 않았나.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전혀 외롭지 않았다. 바다와 하늘, 별, 파도, 새, 물고기들과 교감하면서 끈끈한 정을 나누고 소통했다. 돌고래는 떼를 이뤄 뱃전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렸고 '이리 와'라고 이름 붙인 남극 갈매기는 두 달여 동안 동행하며 길동무가 돼주었다. 헤어질 때 눈물이 핑 돌더라. 사실, 외로움보다는 그리움이 컸다."

-불굴의 의지라고만 보기엔 너무 독하다.

"항해를 시작하면 퇴로나 우회로는 없다. 극복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항구에 닿지 않고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는 모험이라는 점에서 우리 인생과 같다고 생각한다."

-희망항해(Sailing with Hope)였다.

"세계일주 도전 계획을 발표한 다음날 세월호가 침몰했다. 한꺼번에 304명이나 바다 속에 수장시켜야만 했던 국민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싶었다. '희망 항해'란 이름을 요트에 붙인 것도 그래서였다. 내 도전을 보면서 국민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랐다."

-세월호 45일간 현장에 있었다.

"유가족 텐트 안에 들어가는 유일한 기자였다. 동영상도 제일 먼저 받아 특종 했다. 수영만 배웠어도, 바다만 알았어도 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일본도 같은 상황이 있었는데 모두 살았다. 지금은 울어야 할 때가 아니라, 그 울음을 위로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채비하는 게 중요하다.”

-해군사관생도들과의 약속도 지킨 셈이다.

"2013년 3월, 남태평양 횡단(카리브해 버진아일랜드~경남 통영항:6개월 걸림)에 성공한 이후 해사 초청강연에 불려갔다. 그때 생도들에게 세계일주를 반드시 떠나겠다고 약속했다. 난 말하면 꼭 지킨다."

-가을에 떠나 봄에 돌아왔다.

"한국을 떠날 때가 가을이었다. 빙하 피해와 추위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남극해의 여름(12~2월)에 맞춰 10월에 출발했다. 적도를 지날 때는 여름, 뉴질랜드선 가을, 남극은 겨울, 다시 적도에 왔을 때 여름, 한국에 들어올 때 봄이었으니 사계절을 두 번 경험한 셈이다."

-요트 입문 계기는.

"2001년 외국 요트인의 무기항 세계일주 관련 자서전을 읽고 14년간 꿈을 키웠다. 2010년 사업에 실패해 대부분의 재산을 잃고 적은 돈만 남았을 때, 요트 꿈을 실현하자는 결심을 했다. 집을 판 돈으로 크로아티아서 요트를 산 뒤 혼자 몰고 귀국했다. 요트를 배달하는 비용이나 직접 몰고 오는 비용이나 비슷했다."(웃음)

-사실 이전에도 장거리 항해에 성공했더라.

"2001년 뉴질랜드에서 요트에 입문한 뒤 2010~2011년 유럽 크로아티아에서 한국까지, 2013년 카리브해에서 한국까지 항해했다."

-이번에 가장 어려웠던 항로는.

"지난 2월2일 통과한 케이프 혼이다. 케이프혼 해역은 남극해 구간으로 추운 날씨에 연중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로 인해 바다의 에베레스트, 선원들의 무덤으로 불린다. 이 지역을 통과한 이들에게는 '케이프호너'이라는 명예의 호칭이 주어진다. 최대풍속 50노트(kn)의 돌풍과 파고 7m의 높은 파도와 싸워야 했다. 거대한 파도가 덮쳐 요트가 두 번 뒤집어졌다. 요트 밑바닥에 매달려 균형을 잡아주고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발라스트 킬)가 없었다면 배는 침몰하고 말았을 것이다."

-언제가 가장 위험했나.

 "광란의 위도, 울부짖는 50도, 비명의 60도라는 별명이 붙은 남극해다. 떠내려 오는 유빙(流氷)이 지뢰처럼 깔려 있다. 포틀랜드 제도에 있는 사우스조지아섬 인근을 지날 때는 폭 30m 정도의 집채만 한 빙하가 옆으로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작은 빙하라도 한번 부딪치면 끝장이다. 순식간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빙하를 피하느라 며칠 동안 뜬 눈으로 밤을 샜다."

-바람이 잠잠해야 좋은 것인가.

"반대다. 바람이 부는 날엔 앞으로 속도감 있게 전진할 수 있어서 좋다. 오히려 잠잠한 날이 어렵다. 이런 날엔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한다. 폭풍 못지않게 무서운 것이 적도 인근의 무풍(無風)지대다. 바람에만 의지해 항해하는 배에 무풍지대는 지옥이다. 적게는 1~2시간, 많게는 17시간 동안 바람 한 점 없어 닻을 내리고 뙤약볕 아래서 무작정 기다려야만 한다."

-술은 좀 마셨는가.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마셨다. 파도가 심할 때, 요동칠 때는 할 일이 없다. 36시간 동안 보트 조정을 안한 적도 있다.”

-적도의 태양이란 어느 정도인가.

"40℃까지 치솟아 옷을 입을 수가 없다. 거의 옷을 안 입고 발가벗고 지냈다."

-바다가 없는 충북 청주가 고향인데.

"아버지가 교직에 있어 자주 이사를 갔다. 강서 남이초등학교에 다녔고 제천에도 살았다. 아버지의 첫 근무지가 제천의 한 초등학교였는데 경사진 집, 비포장도로, 모래알 때문에 힘들게 오르내리던 기억이 선하다. 아직도 청주에 친인척들이 많이 살고 있다. 지금은 경기도 고양(행신)에 산다."

김 선장은 젊었을 적부터 바다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생 시절 스킨스쿠버 동아리를 만들고 전국대학연합잠수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바다에 빠졌다. 1986년 한강 350㎞를 스킨 다이빙으로 종단하고, 같은 해 일본 시나노강 380㎞를 같은 방식으로 헤엄쳐 건넜다.

-세계 일주 비용은 어떻게 충당했나.

“차도 팔고 시계도 팔고 몸뚱이 빼고 다 팔았다. 지금은 거지다.(웃음) 육상지원팀 퇴직금도 다 쏟았다. 갚아야할 돈이 많다. 8억원 정도가 필요해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나의 꿈을 이야기해주면서 후원을 요청했다. 그러던 중 충남 당진 왜목항에 사는 요트 애호가 김종득 씨의 소개로 당진시와 주민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충남도와 해양수산부, 그리고 700여명의 요트동호회원과 시민들도 도움을 주었다. 한 여고생이 ‘선장님 배에 제 희망을 싣고 싶다’면서 후원금 1만원을 보내주기도 했다.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고등학생 딸의 응원이 무엇보다 힘이 됐다. 지금은 차도 빌려 타고 있다.”

―항해 지원팀이 한 일은.

"항해 기간 내내 요트가 운행하는 지역의 기상정보를 제공할 육상지원팀이 만들어졌다. 박주용 한국크루저요트협회 부회장 등 육상지원팀 10여명은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며 미국·영국·일본 등의 5개 기상사이트 정보를 종합·분석해 매일 위성통화로 알려줬다."

―가장 많이 해먹은 음식은.

"김치찌개였다. 건조한 돼지고기를 물에 불려 김치를 넣고 끓였다. 라면은 이틀에 한 번꼴로 끓여 먹었다. 말린 음식이 싫증나면 칼국수와 수제비도 만들어 먹었다. 밀가루 반죽에 이스트를 넣고 오븐에 구워 빵을 만들기도 했다. 블루베리 잼을 바르거나 옥수수·양송이 수프를 만들어 찍어 먹었다."

가지고 간 식량은 당진 부녀회원들이 준비해줬다. 900ℓ의 물과 쌀, 육포, 고추장, 된장, 들기름 등은 모두 주민들이 직접 만들었다. 감자, 당근, 고구마, 양파, 사과, 바나나 등 채소와 과일은 썰어 말리고 압축 포장해 부피를 줄였다. 라면도100개 챙겼다. 압력밥솥으로 밥도 해먹고, 미역국, 햄찌개, 짜장밥도 만들어 먹었다. 하루 두 끼만 먹었다.

-제일 그리웠던 음식은.

"삼겹살이었는데 귀항 후 실컷 먹었다."

―새싹 비빔밥이 뭔가.

"페트병을 잘라 물에 적신 솜을 넣고 새싹을 길러 비빔밥을 해먹었다. 새싹이 담긴 페트병은 주방용품 인근 기둥에 여러 개 달아놓았다. 새싹은 5일에서 1주일 정도 기르면 먹을 수 있었다."

-살이 쪘겠다.

"오히려 4㎏이 빠졌다."

―낚시도 많이 했나.

"루어(가짜 미끼) 낚시로 1m가 넘는 만새기를 잡기도 했다. 간혹 파도가 높은 날엔 오징어와 날치가 갑판 위에 날아와 푸짐한 상이 차려지기도 했다. 생선구이를 해먹었다."

―잠은 어떻게 잤나.

"쪽잠을 자는 경우가 많았다. 요트가 정해진 코스를 이탈하거나 바람 방향이 바뀌어 돛의 방향을 조정해야 할 때, 또는 비구름이 갑자기 많아질 경우 알람이 울리도록 해놓았다. 짧게는 1~2시간, 길어도 3~4시간에 한 번은 잠을 깨야 했다."

-상어와 사투를 벌였다는 얘기는 뭔가.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하며 돌고래를 촬영하고 있었는데 상어가 접근했다.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배가 얼마나 떨어져 있나 뒤돌아 봤더니 60m가 넘어 크게 당황했다. 상어에게 상대가 몸집이 큰 것처럼 보이려고 팔다리를 크게 벌려 셀카봉을 흔들어 쫓아냈다.”

-요트 이름 '아라파니호'는 무슨 뜻인가.

"내가 지은 이름인데 '아라'는 순우리말로 '바다'라는 뜻이고 '파니'는 달팽이를 말한다. 달팽이는 느리지만 장거리를 쉼 없이 이동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노인과 바다'도 아니고, 나이 쉰셋에 도전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위험한 것에 도전하지 않으면 결코 무엇인가 이뤄낼 수 없다. 나이 50이 넘어서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게 큰 행복이다."

-맥가이버라는 별명이 있다.

“정비는 생활의 노하우다. 탐험대 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에 배든 차량이든 뭐든지 다 고친다. 모든 건 경험에서부터 나온다. 기계가 고장 나면 한참을 관찰하고 원리를 파악한다. 원인만 파악하면 고칠 수 있다. 배어서 부품이 없으면 깎고 다듬어서 고쳤다. 서치라이트(빨간등·파란등) 고장났을 때도 퐁퐁통, 분유통을 이용해 재생시켰다. 망망대해에서 고칠 수 없으면 항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다큐멘터리 PD로도 유명하다.

"세계 곳곳을 모험하며 제작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일본 후지TV 등을 통해 방송되고 있다. 이번 항해 전 과정도 본인 스스로 모두 촬영해 기록으로 남겼다. 국내 해양레저 진흥과 새로운 도전의 영상 자료로 쓰일 것이다."

김 선장은 일본 도쿄비주얼아트 방송예술과를 나와 후지산케이그룹의 공동티브이(TV)에서 경력을 쌓은 뒤 95년부터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일해 왔다. 일반인에게는 KBS '도전지구탐험대', '환경스페셜'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제작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90년에는 5800㎞에 달하는 중국 양쯔강 탐사 다큐물도 만들었다.

-세계 각국을 다 돌았겠다.

“북극만 빼고는.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재산도 부럽지 않다.”

-해적도 만났다고 들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과 자바섬 사이의 순다해협을 막 통과하던 날 밤에 깜빡 잠이 들었을까,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2마일(3.2㎞) 이내에 물체가 다가오고 있다는 레이더 경고였다. 잠에서 깨 황급히 갑판 위로 올라갔다. 일반적으로 해적들은 어둠 속에서 몰래 다가와 서치라이트를 켜고 약탈할 배를 확인한다. 이어 갈고리를 던져 배위에 올라타 장비와 식료품을 약탈하고 선원들을 납치한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요트의 모든 불을 껐다. 갑자기 3척의 배에서 서치라이트가 켜졌다. 여러 개의 빛줄기가 바다 위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급하게 엔진의 봉인을 뜯고 시동을 걸어 도망쳤다. 1시간쯤 지났을까 다행히 해적선들은 멀어져 갔다."

-말솜씨가 좋다.

"뒤늦게 독서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 집에 책이 한 권도 없기에 아버지에게 졸랐다. 아버지와 함께 청계천 중고 책가게서 네 꾸러미를 사가지고 왔다. 한 달 만에 다 읽었다. 물론 대학 때는 책을 던져버렸다. 이 시기엔 몸으로 부딪칠 나이지, 책을 읽을 나이가 아니다. 친구들과 책을 몽땅 집어 교문 밖으로 내던지기도 했다."

-다음 목표는.

"요트세계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싶다. ‘아라파니’ 요트팀을 만들고 세계적인 대회에 출전해 대한민국 요트의 위상을 알리고도 싶다. 교육 매뉴얼과 교육 커리큘럼을 짜고, 기본적인 교육 자료를 만들 것이다. 요트스쿨에서 바람 읽은 법, 정박하는 법, 관리하는 법, 띄우는 법 등 체계적인 교육을 하면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왜목항 내 해양 박물관(가칭 마리나 뮤지엄) 건립도 목표다. 요리를 배워보고 싶은 생각도 조금은…."

-귀항한 후 남긴 말이 너무 멋있다.

"해가 지면 반드시 해가 뜬다. 소중한 삶을 알차게 챙겨야한다. 우리는 물로 이뤄진 가장 아름다운 별에서 태어났다. 이 별에 태어난 것 자체로 희망 아닌가. 바다에는 길이 없다. 길은 내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극복해야 한다. 극복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항구에 닿지 않고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는 모험이라는 점에서 우리 인생과 같다고 생각한다.”

-충청투데이 독자들에게 한마디.

"살아가는 것이 무척 힘들지만 희망의 끈을 절대 놓지 않고 정진하면 몇 년 뒤에는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도전하는 용기가 중요하다. 끊임없이 도전한다면 반드시 이뤄지는 것이 꿈과 희망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망설인다'는 단어를 굉장히 싫어한다. 망설이면 안 되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움직이고 행동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나도 힘든 적이 있었지만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며 참고 지냈다."

-요트는 사치라는 생각이 있다.

“요트는 사치산업이 아니라, 레저산업이다. 이번 세계 일주를 계기로 요트가 힘든 일이라는 걸 국민들도 인식했을 거다. 앞으로 많이 보급시키고 이해시킬 작정이다. 대중화의 선봉에 서겠다는 뜻이다. 셰일링요트는 태양광과 바람으로만 간다. 항해 7개월간 1원도 안 썼다. 국민들 의식이 많이 바뀌었고, 바뀔 것이다. 요트 대중화 선봉에 서겠다."

바람의 아들에게 바람은 목숨이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요트는 멈춘다. 바람은 어떠한 흔들림에도 그냥 앞으로 분다. 홀로 바람에 배를 맡긴 채 7개월을 살았던 김 선장은 인생 후반부도 바다인으로 살겠다고 했다.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다. 그래서 바다는 어머니의 품이다. 유일하게 바다가 없는 충북에서 태어난 김 선장은 바다를 품에 안았다. 망망대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도로스, 그는 우리들의 ‘희망 선장’이다.

당진(왜목항)=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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